살아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초적 본능은 욕망과 두려움이다. 생명을 부여하려는 성욕,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식욕, 욕망과 두려움의 균형을 잡는 세로토닌 그리고 생명을 잃지 않고자 하는 생명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른 생물과 비교하여 사람은 주어진 생명을 유지하거나 버릴 수 있는 선택력이 더 크다. 사람은 순간순간 존재와 비존재, 생명과 반생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인간이 욕망과 두려움의 조화를 통해 어떻게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아래쪽 그림은 도파민이 지배하는 두뇌 신경회로이다. VTA(ventral tegmental area)라는 곳에서 시작해서 쾌감 센터(nucleus accumbens)를 지나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 이르기까지 도파민은 쾌감과 보상 심리(nucleus accumbens) 그리고 동기 유발(prefrontal cortex의 기능)을 주도한다. 쾌감, 보상 심리, 동기 유발을 한마디로 욕망(끌리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성욕과 식욕을 바로 두뇌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도파민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욕망 호르몬이
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끌리기보다 사망에 끌리게 되었다.성욕도 ‘ (마음)’과 ‘生(생명)’을 나누는 것보다 쾌감만 즐기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고, 식욕도 세포를 건강하게 하는 것보다 혀만 즐겁게 하는 쪽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물원의 짐승들이 음식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다양한 재주를 부리듯이 사람도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관계(신의)보다는 보수를 쫓아다니는 경향이 있다. 천국의 주인을 사랑하는 신앙생활 대신 천당만을 원하는 기복신앙이 훨씬 더 인기가 있다. 즉 복 받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결국 관계는 죽어 가고 있다. 몸과 마음이 죽음과 입맞춤하는것이다. 지나친 욕망(중독)에 빠져 있을 때,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사람을 다시 올바르게 잡아 주는 경각심을 일으킨다.몸과 마음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두려움(fear)이 경외하는 마음(awe)뿐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상태에 따라 두려움과 경외하는 마음이 교차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해로 비롯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반생명적이지만, 생명을 상실하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 두려움의 기전을 파헤쳐 보자.
노르아드레날린(두뇌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은 생명이 위협을 받았을 때 분비되는 꼭 필요한 두려움의 두뇌 전달 물질이다. 편도체(Amygdala)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도파민이 끌림(욕망)의 호르몬이라면 노르아드레날린은 피함(두려움)의 호르몬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긴장감, 조바심, 불안감 등은 두려움의 다른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 이 속담에서 놀란 가슴이 바로 편도체(Amygdala)이다. 편도체는 한 번 느꼈던 두려움을 고스란히 저장해 놓았다가 후에 비슷한 상황이 또 생기게 되면 민감한 반응을 하게 하는 두뇌 조직이다. 심장의 박동 수가 증가하고 눈동자가 커지며 근육이 경직되는 등 다양한 반응을 자아낸다. 생명을보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려움이 지나쳤을 때 초조함, 불안감,우울증 등이 생긴다.
성격이 완벽한 사람을 깊이 살펴보면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이나 인정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완전론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지나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관계의 완전함(온전함)을 원하시지 행동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관계의 온전함을 누리는 것은 언약, 행동의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은 계약이라 할 수 있다. 언약은 인간의 실수로 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선택을 할 때 언약적인 관계가 계약적인 관계로 전락하는 것이다. 계약적인 관계에는 조건이 있지만, 언약적인 관계에는 상호 간의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다. 서로 100퍼센트 사랑한다는 신뢰 관계 안에서는 실수를 했을때 은혜를 체험하지만, 계약적인 관계에서는 죄책감을 느낀다. 잘못된 길을 갈 때 느껴지는 두려움이 은혜의 힘으로 올바르게 되면 언약적인 관계가 유지되지만, 그 두려움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면 그 관계는 이미 계약적인 관계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욕망과 두려움의 균형을 두뇌의 세로토닌을 통해 이루어 주신다. 욕망이 두려움보다 크면 중독, 두려움이 욕망보다 크면 우울증으로 변한다. 중독은 의식하지 못하며 죽어 가는 것이고, 우울증은 의식적으로 살고 싶지 않아 죽어 가는 것이다. 세로토닌은 사람의 눈이
빛과 마주쳤을 때 분비되며 욕망과 두려움의 균형을 회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이 눈을 뜨고 빛을 통해 천연계를 보는 것은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니 평정을 찾는 것이 아닌가? 위의 과학적인 내용으로 아래 성경절을 비추어 보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4장 7절).
위 성경절이 말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은 경외함과 경각심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을 잃지 말라는 강한 호소인 것이다. 심판은살리기 위한 심판이지 죽이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그리고 ‘경배’라는 단어는 ‘입 맞추다(kiss)’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과 입을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과 입을 맞출 때 도파민(욕망 호르몬)이 분비되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 노르아드레날린(두려움 호르몬)이 활성화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경외함)으로 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욕망을 하나님께로 향하여(입맞춤인 경배를 통해) 생명을 지키라는 뜻이다. 이 욕망을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바벨론이고, 자아로 향하는 것이 짐승의 모습이다. 바벨론은 무너졌고, 짐승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4장 8~12절까지의 영원한 복음(요한계시록 14장 6절)의 내용이다.
언뜻 보면 무서운 내용이지만 두려움과 경배(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욕망)를 의학적으로 이해하고 말씀을 보면 요한계시록 14장 6~12절까지가 왜 영원한 복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학과 성경의 저자(하나님)가 같기 때문이다.